- 율곡 이이
퇴계와 더불어 조선조 성리학의 정화를 이룬 율곡(栗谷, 1536~ 1594) 철학의 특성은 천재적 명석성과 원융성에서 찾을 수 있다. 송우암은 이르기를 "스승을 말미암지 않고도 도체(體)를 묵계함이 마치 이학의 비조인 주렴계와 흡사하다"고 했고, 김농암(金農巖)은 “퇴계는 학(學)으로, 율곡은 이(理)로 뛰어났다"고 평하였으며 성우계(成)는 그가 진리의 본원을 통견하고 채용에 통달한 경지로 미루어 삼대(三代)의 인물이라고 하였다.
율곡은 참으로 명석한 인물이었다. 23세 때 과제에 응한 천도책은 당시 조야는 물론 중국에까지 놀라운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또 초기의 학설이 만년의 <성학집요(聖學)>나 <인심도심>등에 나타난 것과 거의 일치하는 보기 드문 일관성을 지닌 학자이 다. 율곡은 이기설에 있어 개념상의 부잡성(性)에 주목하지만, 사실에 있어서의 불리성(性)을 소홀히 하지 않는 입장을 취한다. 그가 화담을 인정하는 것도 바로 화담이 이기(理氣)가 서로 떠날 수 없는 표처를 명확하게 보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독서하는 따위의 공부와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발하는 것은 기(氣)요, 발하게 하는 까닭은 이(理)라고 함이 율곡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는 기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하는 바 없다고 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을 견지하면서 이 견해는 성인이 다시 살아 나와도 바꿀 수 없는 정론이라고 강한 확신을 나타낸다. 그가 "이기는 묘합되어 있다"고 한 것은 이와 기가 혼융무간한 까닭에서 그렇게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기는 본래 합 해 있는 것이지 비로소 합하여지는 때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와 기를 판연히 이물로 구별해 보려는 것은 결코 도를 아는 자의 태도가 못된다”고 했다.
율곡은 또한 그 사상의 원융성과 포괄성이 돋보이는 학자이다. 그는 당시 성리학 일색의 사상계에서 이단으로 배척하던 불교나 노장철학 및 양명학 등에 대해서도 선입견을 버리고 그 본령에 대해 깊은 연구를 했으며, 정학이라 하더라도 주자 등 선유에 대해 결코 묵수적인 자세를 취하지는 않는다. 학문의 자유와 자율성을 긍정하는 정당한 자세를 지녔고 서로 대립되는 견해를 혼용시키는 역량도 지녔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 그는 퇴계와 좋은 대조가 된다. 퇴계가 전일순의 태도였다면 율곡은 종합분석적이었고 객관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퇴계는 매월당 김시습에 대해 일종의 이인이며 색은행과에 가깝다고 혹평했으나, 율곡은 그의 횡담수론이 유가의 종지를 크게 잃지 않았으며 비록 선도(道)에 출입이 있으나 그 본질을 병원을 깊이 탐구했던 심유적불의 사람이라고 하여 허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이기론에 있어 퇴계의 이발설을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는 율곡이지만, 퇴계의 인격과 그 의리를 깊이 탐구 하여 정미를 다하는 학문적 태도는 깊이 흠앙하는 바였다.
학문과 인격에서는 퇴계를 존중했으나 경세(經世)면에서는 정암(靜庵)을 추앙했다. 그는 "정암은 도학(道學)을 창명했고, 퇴계는 이굴에 침잠했다"고 평하고, 정암의 도학사상을 높이 선양하였다. 그가 퇴계와 정암을 문묘에 종향할 것을 상소한 것이나 해주 은병정사에 사당을 세 고 주자와 함께 정암과 퇴계를 나란히 배향하고 그 학덕과 경륜을 추모한 것 또한 우리는 율곡의 학문적 성취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율곡에 의하면 진정한 학문은 반드시 내적으로 인륜에 바탕을 둔 덕성의 함양과 외면으로 사물의 이치에 밝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정리를 정밀하게 탐구하는 까닭도 오로지 몸과 마음을 바로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내면적 성찰과 사물과 상황에 대한 통찰력이 갖추어질 때 비로소 학은 그 공효를 나타낼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따라 그는 자기가 처한 시대를 중쇠기로 판단, 적극적 설시(設施)를 통해 개혁할 것을 역설하고 실제로 나아가 행도하려 했다. 정치란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은 실(實)을 힘씀이 귀한 것이니 시의를 무시하거나 실공(實功)을 도외시하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해도 전혀 치효가 나타날 수 없는 것이요, 마땅하게 한다는 것은 곧 법을 세워 민생을 도모하는 것이니 때에 따라 변동함은 상도라 하였다.
- 송시열
율곡의 고제(高)로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있는데 성리학과 예학에 전념하여 한국 예학(學)의 종장이 되었다. 김장생 문하에서 17세기 이후 조선의 학술과 정치 사회 일반에 최대 영향을 끼친 대학자가 나왔으니 곧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다. 그는 왜호 양대 전란과 수차에 걸친 민란 등 왕조 500년 중 가장 극심한 내외환으로 사회기강의 혼란 및 상하의 난상패륜이 극도에 달했던 17세기를 살아가면서 참다운 삶의 모습이나 대자연의 이법(理)을 밝히고 비뚤어지고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바로 잡는 것(明正)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성리학자다. 송우암에 있어서 학문의 본령은 <직(直)>이었다. 그는 직이야말로 공자, 맹자, 주자 세 성인이 서로 주고받은 심법으로 유가사상의 핵이 된다고 하였다. 공자는 사람이 태어남에 직하다 했고, 맹자는 호연지기는 직으로 기른다 했으며, 주자는 학문의 요령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원리나 천지가 만물을 낳는 원리가 모두 직이라 했음을 들어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직은 인간의 본래성 또는 천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인욕이나 사심에 의한 삶은 적의 삶이 못된다. 그는 작은 곧 시(詩)의 대지인 사무사
논어의 인(仁), 「중용」의 성(誠), 「대학의 경(敬)」과 같은 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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