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라톤의 시라쿠사 여행, 관념적 이데아
인간 삶에서 누군가 일반적 통념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일을 행하는 경우는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로써 일반 사람들이 미리 판단한 선입견은 나중에는 완전히 변화되지요. 그래서 흔히 다음과 같은 말들이 퍼집니다. 한 인간에 관한 통상적 사상은 모든 사회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서 결국 거짓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가령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은 순수한 관찰의 사상가 내지는 명상적 이상주의자로 간주됩니다. 이에 반해 소크라테스에 관해서는 그가 자라나는 젊은이들을 유혹에 사로잡히게 하는 등 불경죄를 저질러서 정치적 순교자로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플라톤은 이른바 이념을 관찰하는 사상가였으며, 아울러 단순한 이념과는 다른 어떤 거의 불변하는 에로스를 집요하게 추구한 교사였습니다. 오늘날 적극적이지 않은 사랑을 플라토닉 러브라고 명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떤 사명을 위해서 세 번씩이나 목숨을 걸고 여행한 사람이 플라톤이었습니다. 자신의 이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하여 시라쿠사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하나의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마흔의 나이에 플라톤은 위험을 감수하고 시라쿠사로 여행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그곳의 참주를 설득하여 더 나은 정치 체제를 실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자, 주위 사람들에게 오해의 여지를 남깁니다. 누군가 플라톤이 모반에 가담했다고 말하며 그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곳의 참주를 권좌에서 끌어내어 자신의 고유한 유토피아 국가 이념을 실현하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조용하고 고상한 아테네 출신의 귀족은 자신의 이론을 행동으로 실천함으로써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플라톤은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노예 시장에 팔려 어디론가 떠났습니다.
운명에 자신의 목숨을 팔아 버린 이 남자는 나이 예순이 되었을 때 두 번째 여행길에 오릅니다. 이번에는 참주의 아들을 찾아갔습니다. 이때 플라톤은 어린 독재자에게 결코 아름답지 않은 직언을 서슴없이 던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라쿠사의 사람들은 이번에는 아테네 출신의 체제 파괴적인 철학자를 독살하려 했습니다. 그는 다행히 독살당하지는 않습니다. 플라톤은 고령의 나이에 이르러 세 번째로 시라쿠사로 여행합니다. 이번에도 그의 견해는 체제 파괴적으로 간주되어 플라톤의 시도는 실패하게 됩니다. 행운인지는 몰라도 오늘날 학교의 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플라톤 글쓰다가 사망하다.>
상기한 내용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후세 사람들은 설마 명상적 철학자인 플라톤이 그런 일을 했을까 하고 반신반의했던 것입니다. 플라톤은 마치 관료주의자처럼 살았다고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가령 빈델반트'는 작은 책자에서 시라쿠사 여행을 은폐하고, 고상한 말로 플라톤의 삶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모든 학자들 가운데, 플라톤은 가장 고결한 사람이었으며, 그렇게 머물렀다.> 사람들이 절대적 이념 추구의 사상가에게서 현실적 실천 행위를 기대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플라톤 철학의 중요한 표시로서 이념의 명상적 관찰을 완전히 파기할 수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역사에서 우리는 플라톤의 국가 유토피아보다 더 낫고, 더욱 인간적인 사회 유토피아의 모델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노예 제도를 처음부터 용인하며, 세 가지 계층을 철저하게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세계를 변화시키려 했으며, 그의 마음속에는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거대한 열정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를 여실히 보여 주는 사건이 바로 시라쿠사 여행입니다.
이론적으로 미약하다고 자인하는 스토아학파 사상가들도 플라톤의 시라쿠사 여행에 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폭력 없는 세계 국가를 하나의 사회 유토피아로 간주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본의와는 달리 나중에 마구 폭력을 자행하는 로마 제국을 정당화하는 데 교묘하게 이용되었습니다. 물론 스토아학파 사상가들 가운데 예외적인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가이우스 블로시우스라는 학자가 있는데, 그는 훗날 호민관으로 활동하게 될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게 스토아 사상을 가르쳤습니다. 블로시우스는 자신의 제자에게 <친근한 자연과 일치시켜라> 하고 요구했습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학설에 있어서도 흔히 사람들이 막연히 믿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순수하게 관념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그가 물질을 부인했다는 것은 타당합니다. 물질은 플라톤에게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데아 자체가 나중에 고상하게 떠오를 존재를 아직 분명히 보여 주지 못합니다. 따라서 플라톤의 여러 이데이들이 오직 통상적 의미에서 실체의 모습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여러 이데아들과의 <동참>은 결코 보다 높은 단계에 의해 제한되지는 않습니다. 이상주의자 플라톤은 악의 이데아, 똥의 이데아 그리고 노예의 이데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파로우시아>란 필연적인 것으로서, 똥이나 노예의 형상 속에도 이러한 이데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천한 것들도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개별자 내지 가장 개별적인 무엇 속에서도 이데아가 발견될 수 있다고 합니다. 나아가 보편성 없이 물화된 이데아도 있으며, 의미 없는 순수하게 관념적인 우주적 존재를 모아 둔 이데아도 있습니다.
출처: 서양 중세 르네상스 철학 강의(에른스트 블로흐 지음, 박설호 옮김)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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