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르툴리아누스
어떤 다른 사상적 흔적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이것은 하나의 흐릿한 표시로서 얼핏 보기에는 철학적 임무라든가 사유와는 무관하며, 신의 뜻을 그냥 수용하는 신앙과 관련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교부 신학자로서 매우 열정적인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분명한 입장을 견지할 정도로 당파적이며, 대담한 학자였습니다. 문체의 측면에서도 그는 기이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령 테르툴리아누스는 고대 후기의 대부분의 교부들처럼 아프리카 라틴어로 글을 썼습니다. 테르톨리아누스의 기본 공리는 <신앙은 터무니없음과 같다>입니다. 이러한 발언은 얼핏 보기에는 철학적 사고 같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철학의 역할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닙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깊은 숙고 끝에 단순히 수동적인 신앙 대신에 어떤 엄밀한 개념. 즉 불명료성을 긍정적인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계몽적 사고가 함축되어 있지요. 그의 문헌은 오늘날 약 30편 정도 남아 있다. 여기서 초기 기독교의 핵심적인 문제들(교회 체제, 성례식 그리고 삼위일체 이론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법학을 전공한 그의 글에는 법률적 논거로서의 옳고 그름이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는 영지주의자에 대항하여 육체성의 의미를 중시했습니다. 이로써 그의 비판은 그노시스를 추구하는 영지주의, 마르키온의 사상. 그리고 기독교가현설 등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만큼 수많은 역설을 지닌 종교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창조자가 마구간에서 갓난아이로 태어났다는 사실. 구세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 그리고 정상적인 이성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 등이 사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도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모든 내용은 신의 계시에 의해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생겨나게 된 것이 인간적 사고와 종교적 대상 사이의 거대한 긴장 관계입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난센스를 담은 불가지론이 아니라,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어떤 이치에 맞지 않는 특성입니다. 기독교는 터무니없는 내용을 믿으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종교가 우리에게 어떠한 긴장감을 가져다주든 간에 우리는 이성의 영역에 머물며 살고 있습니다. <불합리한 내용>은 논리학의 카테고리에 해당하지만, 난센스와 같은 <터무니없는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둥근 사각형>은 터무니없다기보다는 이치에 맞지 않는 가상적 사물이지요. 그러나 때로는 불합리한 내용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은 놀랍게도 마치 신하처럼 허리를 굽히는, 제한된 오성을 바로 세우는 데에 쓰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그 자체 수많은 역설을 담고 있는 종교로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충동을 정반대로 향하게 합니다. 이를테면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밀어라 등과 같은 말씀을 생각해 보세요.
블로흐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신앙심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철학적 사고를 다만 신앙이라는 테두리 속에 국한시켜서 생각하는 오류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믿을 만한 것은 허튼 것과 같다>고 말한 바 있지요. 그렇게 말한 장본인이 이번에는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것을 무엇보다도 감각적 인지 행위 속에서 찾게 됩니다. 인간의 이성이 찾아낸 것은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하면 허튼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감각적 인지 행위와 기독교의 계시론 사이에는 거대할 정도의 공허한 곡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감각적 인지 행위는 그 자체 명확한 것입니다. 포이어바흐식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 교부들 가운데 테르툴리아누스만이 이를 인정하고 있지요. 테르툴리아누스는 스토아 사상뿐 아니라, 데모크리토스 그리고 고대의 다른 유물론자들의 견해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감각 기관이 보여 주는 대로 물질적 개체를 현실에 존재하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질적 개체는 플라톤에 의해서 구체적 형태라는 이유로 파기된 바 있지요. 이 점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지금까지의 고대 관념 철학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비합리성을 진정한 것으로 가르친 사람은 공교롭게도 인간의 감각을 신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모든 실재하는 것, 영혼, 심지어는 신 (神)까지도 구체적 형상을 지닌다고 설파했습니다. 그러한 한 테르툴리아누스는 유물론자의 면모를 띄고 있습니다. 그는 신의 영적인 삶에 관해서 인간이 더 이상 이성적으로 발언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테르톨리아누스는 예지적 질료의 개념을 플로티노스 이전에 이미 파악하여, 인간적 감각이 동원된 유물론적 입장을 신이라는 지고의 대상 속에 투여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테르툴리아누스의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 좌파로 향하는 연결 고리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이유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질료의 품격을 한 단계 높였을 뿐 아니라, 이것을 가장 고귀한 신학적 명예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테르툴리아누스의 경우에 질료는 신의 근본적 구성 요소일 뿐 아니라, 신이 질료의 모티프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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