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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서양 중세 르네상스 철학 강의-프로타고라스

by 여행하는_캠퍼 2023.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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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타고라스

 

프로타고라스'의 상은 흐릿합니다. 확정된 게 아니라 흐릿할 정도로 흔들리지요 그런데 소피스트들의 배후에 감추어진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모습은 질서를 해치는 듯이 보이지만 드물기는 하나 주어진 관습이라든가 구태의연한 인습에 대해 완강하게 저항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아테네의 계몽주의는 느닷없이 급작스럽게 들이닥쳤습니다. 이는 탈레스에서 서서히 시작되는, 이전의 이오니아 계몽주의와는 다른 것이었지요. 아테네 계몽주의는 소피스트들의 주관주의적 관점에 의해서 완전히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부적으로 소피스트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계몽주의의 주도적 인물은 프로타고라스였습니다.

 

그가 한 유명한 말은 잘 알려졌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사물의 척도는 다름 아니라 인간이며, 존재하는 데 따라 현존하고, 존재하지 않는 데 따라 현존하다. 기원전 490년에서 411년 사이에 주로 아테네에서 살았다. 소피스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대부분의 관습을 따랐지만, 특히 신에 대한 믿음에 대해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했다. 그리하여 그의 저서들은 기원전 415년경에 불태워지고, 그 역시 아테네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안트로포스>라는 단어 속에 는 인간, 개인 그리고 종() 등과 같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나아가 <오스> 라는 단어는 독일어로 <그것>이라는 의미 외에도 <어떻게>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만약 <안트로포스>라는 단어가 <개인> 내지 <개별적 존재>를 뜻한다면, 프로타고라스의 공리는 주관적 임의성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만인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말할 수 있으며, 이로써 어떠한 무엇도 증명될 수 없을 것입니다. 취향에 관해서 인간은 서로 다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프로타고라스 식으로 모든 것을 이해한다면, 모든 취향이라든가 모든 합의나 양해는 불필요하며 자연적으로 파괴될 것입니다. 언젠가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잠자고 있을 때 인간은 모두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지니고 있지만, 깨어 있는 자에게 세상은 공동적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발언은 프로타고라스에 의하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어 있는 자들 또한 제각기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이와는 달리 <안트로포스>라는 단어가 인간이라는 종() 내지 인류를 가리킨다면, 프로타고라스의 문장은 전적으로 포이어바흐의 사상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젊은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급진적이라 는 말은 사실을 근원까지 포착해 내는 일이다. 그러나 인류의 뿌리는 인간 자신이 다. 이 당시에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사상을 부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이 말은 프로타고라스가 내세운 인간 척도에 관한 공리를 인간학 적으로 변조시킨 문장이나 다름없습니다. 신적 요소는 <사회의 구체적 현실이라는 앙상블' 속에서 인간적 요소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사물의 척도는 궁극적으로 <사회의 구체적 현실이라는 앙상블>일 테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프로타고라스의 문장은 마르크스주의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됩니다. 만물의 척도로서 존재하는 인간이 문화 사적으로 모든 것을 변혁시키기 전에 어떻게 존재했을까? 인간 존재의 근원은 어떠한가? 만약 인간에게 정해진 관습, <노모스 Nomos> 그리고 강요된 법 등이 없다. , 인간은 어떻게 존재했겠는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세요. 만약 인간이 자유롭게 가치들을 선택하고, 어떠한 외부적 사항도 그에게 어떤 특정한 판단을 내리도 록 강요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떠할까요? <피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전까지 는 그 자체 아무 의미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에 해당할 뿐, 외부로부터 강제적으로 주어진 자연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르네상스 사진-1

<피지스>는 그리스어로 <출생, 근원, 성장, 자연, 소질>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이데거의 해석에 의하면 그것은 성장하게 하는 것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자연, 육체 등의 의미가 아니라, 빛을 가져다주는 무엇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피지스는 <빛을 발하는 개방적인 무엇>으로서 현존하는 시 원래 많은 소피스트들에게는 향락적 방종이라든가, 민중의 지도자에게 해당하는 무엇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고립주의의 윤리 속에는 모든 게 이런 식으로 양날의 칼이었습니다. 소피스트들은 한편으로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무엇을 발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경박하게 내뱉으며 해체시켰습니 다. <피지>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해체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러쿵저러쿵 논의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유한 고객들은 소피스트들을 찾아와서 여러 가지를 부탁했는데, 그 가운데 현존하는 것을 파괴하라는 전언은 없었습니다. 항상 속물들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이야기를 즐겨 들으려 했지요. 그들은 소피스트가 하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말이든, 비판적 이론적 내용을 담고 있는 말이든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소피스트들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항을 증명해 냅니다. , 노예 제도는 그 자체 <피스>가 아니며, 이는 <노모스>에 의해서 철폐될 수 있다. 인간이 노예로 살아 야 하는 것은 결코 당연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속물들은 이 말을 듣고 깊이 숙고한 게 아니라. 그저 농을 즐겼을 뿐입니다. 그들은 소피스트의 어떤 특정한 발언이 향락적 자유 시간에 조금이라도 이득이 될 경우, 즐겨 듣곤 했습니다. 가령 부모가 자식들과, 그리고 자식들이 부모와 동침하여 살을 섞어서는 안 된다는 발언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소피스트가 이러한 발언이 피지스>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강제적이고 비자연적인, 원래의 삶과는 전혀 낯선 <노모스>에서 유래했다고 주장 한다면, 속물들은 이를 농담으로 거론하며 희희낙락거렸을 것입니다. 소피스트들의 사고는 이질적인 것들을 전적으로 동질화시켜 버렸습니다. 노예 제도의 철폐라 는 심도 깊은 내용이 농담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동침에 관한 하찮은 내용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 두 가지 내용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흥미진진한 것이었습니다.

 

 

출처: 서양 중세 르네상스 철학 강의(에른스트 블로흐 지음, 박설호 옮김)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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