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원론자들
고대 그리스에 있어서 엘레아학파의 <존재>의 철학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의 철학은 서로 대립하는 철학의 2대 진영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는 하나의 전체이면서 또한 생성 변화하는 것이므로, 존재의 원리를 전제하면서 생성을 설명하는 것이 그 후의 철학의 과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칠리아 섬의 아크라가스에서 출생한 엠페도클레스(Empeclokles, BC. 제2장 초기 그리스 철학 43 495경-435경)는 엘레아학파의 <존재>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을 결합시키려 했다. 그는 전에 없었던 것이 생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있는 것이 없어지는 법도 없다고 하는 엘레아학파의 사상에서 출발하여, 흙·물·공기·불의 4 원소를 불멸의 존재로 보았다. 이 네 원소는 분할될 수는 있어도 제각기 독립하여 있어서 서로 다른 것으로부터 나올 수는 없다.
원자론자인 레우키포스(Leukippos, B.C. 440경이 그의 전성기)와 데모 크리토스(Demokaitos, B.C. 460경~370경)는 엘레아적 원리와 헤라클레이토스적 원리의 결합을 엠페도클레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수행하려 하였다. 이 두 사람 가운데 나이가 적고 더 유명했던 데모크리토스는 이오이아인의 식민도시 아브데라(Abdera)에서 출생했는데, 매사에 웃는 낙천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웃는 철학자>라 불렸다. 이 원자론자들의 아토마(atoma), 즉 원자란 불변하며, 연장(長)을 가지고는 있으나 불가분이고, 양적으로만 규정되며 너무 작아서 감관으로는 지각할 수 없는 미립자다. 이 원자들은 질적으로 변화하는 일이 없고, 각기 서로 다른 크 기와 모양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요, 갖가지 꼴(예를 들어 A와 Z)과 순서 (예를 들어 AN과 NA)와 자세(예를 들어 N과 Z)로 결합됨으로써 다양한 세계가 형성된다. 그런데 원자들이 이렇게 결합되려면 공간이 없어서 는 안 된다. 그러므로 있는 것은 충실된 것으로서의 원자들과 공허한 공간뿐이다. 따라서 이 공간도 원자들에 못지않은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데모크리토스는 "존재는 무(無) 이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충실된 것은 공허한 것 이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원자들을 갖가지 모양으로 결합시켜서 온갖 사물들을 만들어내 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데모크리토스에 의하면, 원자들 자신 속에 그러한 결합의 근거이나 <마움> 같은 정신적 원리, 혹은 신(神) 같은 것을 끌어들이고 있다. 서로 다른 원자들이 공허한 공간 속을 떠돌아다니면서 서로 충돌하면 거기에 소용돌이가 생긴다. 비슷한 원자들이 이 소용돌이에 모여들어 원자들의 갖가지 복합체가 생기며, 그것들은 그 본성상 다시 해체된다. 이 결합과 해체를 지배하는 일정한 원리는 없다. 다만 절대적 필연성이라 할까 하나의 운명이라 할 것이 있을 따름이다.
아낙사고라스는 네 원소나 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원자를 가지고는 무한이 다양한 만물의 성질의 차를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질이 다른 무수한 원소가 있다고 보고 이것들을 <씨(spermata)>라 고 불렀다. 이 근본적 구성요소인 씨란 엠페도클레스의 불·공기·물·흙 같은 보통 원소가 아니요, 무한히 다양한 질료, 곧 <만물의 종자>로서 모든 개별적 물건(돌·금·뼈 같이 동질의 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을 구성 하는 것이다. 그래서 후세사람들은 이 씨를 <동질소>라고도 불렀다. 이 씨들은 무한히 작고 단순하고, 본래 혼돈한 혼합 상태에 있었다. 그러던 중 <누우스>(nous)가 정지 상태에 있는 이 물질의 작은 덩어리들이다 가 영원히 계속되는 운동을 일으키게 했다. 아낙사고라스는 말한다 "모든 사물은 함께 어울려 있었고, 수에 있어서나 작음에 있어서나 무한하였다. 거기에 <누우스>가 더해져서 만물에 질서를 주었다." 아낙사고라 스에 의하면, 누우스란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것, 다른 어떤 것과도 혼합되어 있지 않는 것, 운동의 근거, 스스로는 부동이면서 어디에서나 작용하고 있는 것, 만물 가운데 가장 미묘하고 순수한 것이다. 물질을 움직이 게 하는 이 누우스는 유기체에서는 특별히 뚜렷하게 나타나며, 모든 생물에 있어서는 갖가지 정도의 크기와 힘을 가지고서 그 생물들을 살아가게 하는 혼으로서 내재해 있다. 따라서 누우스는 만물을 각기 그 본성을 따라 배열하고, 만물로 하여금 존재의 갖가지 형태를 가진 우주가 되게 하며, 자기 자신은 개성적 생명력으로서 우주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낙사고라스는 물질세계를 움직이게 하고 조화 있는 우주를 형성하는 원리로써 누우스라는 일종의 정신적 원리를 내세움으로써 물질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사랑>과 <미움>이라는 신화적인 힘으로 본 엠페도클레스나 <우연>이라고 하는 무의식의 필연이라고 본 데모크리토스의 사상보다 크게 전진하였다. 그는 <예지>라 할까 <정신>이라 할 수 있는 <누우스>가 물질과 함께 있으면서 세계에 질서와 합목적적 운동을 준다고 생각함으로써 철학으로 하여금 하나의 위대한 원리, 즉 물질만으로 세계를 설명하지 않는 하나의 정신적 원리를 획득하게 했다. 그러나 아낙사고라스는 이 원리를 완전히 확립하지는 못하였다. 막상 누우스가 무엇인가를 설명함에 이르러서는 물질적인 것들을 가지고 설명하였던 것이다.
출처: 철학개론(최명관, 곽신환 지음)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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