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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 개론-엘레아 학파

by 여행하는_캠퍼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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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레아(Elea) 학파

 

엘레아(Elea) 학파는 감각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모두 부인하고, 참으로 있는 것은 순수한 존재뿐이라는 원리를 세웠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이오니아학파의 감각적 원리 및 피타고라스학파의 양적 원리 대신에 예지적 원리를 세웠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양과 시공관계를 근본적 원리로 삼았지만 그 원리는 아직 물질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엘레아학파는 존재의 모든 유한한 한정성과 모든 변화를 부인하였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우리의 착각일 따름이다. 이 세계는 결국 영원불변하는 하나의 존재일 따름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존재의 다양성을 유일의 궁극적 원리에 환원시키려 했으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현상계를 철저히 부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 모순을 넘어서려 하는 데 그들의 노력이 집중되었다.

 

엘레아학파의 철학적 방향을 시작한 사람은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B.C. 570~480)이다. 그는 소아시아의 콜로폰(Kolophon)에서 출생하여 남이탈리아의 엘레아에 이주하여 살았다. 그는 방랑시인으로서 여러 고장을 여행하는 중에, 사람들이 신들에 대하여 서로 다른 관념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트라키아인들은 신들의 눈이 푸르고 머리는 붉다고 생각하였으며,, 아프리카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들은 그 빛깔이 검고 코는 납작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들 모양대로 신들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크세노파네스는 만일 말이나 소가 신들의 관념을 가질 수 있다면 말이나 소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라 하였다. 이런 것이 신에 대한 참된 관념일 수는 없다고 그는 확신하였다. 신은 일 자일 것이요, 결코 사람이나 짐승 같은 유한자는 아닐 것이었다. 신은 사람들과 같은 감관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요, "그 전체로 보고 그 전체로 생각하며, 그 전체로 듣는" 존재일 것이었다. 신은 그 정신 내 지 그 사고에 의하여 만물을 지배한다. 이리하여 세계를 <하나이며 전체>라고 보는 엘레아학파의 사상은, 그에게 있어서는 아직 신학적·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신의 단일성이라고 하는 관념과 민족종교의 의인관에 대한 반박이 그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신들이 출생했다거나, 사람과 같은 소리와 자태를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 망상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또 신들이 약탈도 하고, 간통도 하고, 기만도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호메로스(Homéros)나 헤시오도스(Hesiodos)를 매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단일하고 불변하는 신을 최고의 철학적 원리로 확립하였다. 여기에 이르러 인류의 철학은 신에 대하여 상당히 높은 사상에 올라섰다고 하겠다.

 

엘레아학파의 주도적 인물은 파르메니데스(Parmenidés, B.C. 540경 출 생). 고대에 있어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엘레아의 현인을 외경했고, 그 정신의 깊음, 그 지조의 견실하고 숭고함을 찬탄했다.

 

파르메네데스는 그의 철학을 자연에 관하여라는 서사시 속에서 전개하고 있다. 이 서사시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에서는 순수한 유일의 <존재>를 다양하고 변화하는 모든 것에 대립시키고 있다. 변화하는 모든 것은 참으로 <없는 것>이요,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참으로 있는 것은 <존재>뿐인데, 존재는 생성도 하지 않고 소멸도 하지 않으며, 전체요 하나로서 무시간적으로 영원히 있다. 생성이라든가 변화라든가를 인정하는 것은 감각에 사로잡힌 데서오는 <억 견(doxa)>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을 따라서 보면 어디까지나 오직 <있는 것>이 있으며, <없는 것>은 없고 생각될 수도 없다. 오직 이것 만이 진리인데, 이와 같은 진리의 세계에서는 <없는 것>은 아예 없고 생각될 수도 없기 때문에 생각한다고 할 때에는 반드시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파르메네데스는 "생각과 존재와는 같은 것"이 라고 단언하였다. 그는 순수한 존재를 향한 순수한 생각을 현상의 다양성과 변화에 관한 어설픈 생각에 대립시켜, 유일의 진실하고 확실한 인식이라 불렀고, 사람들이 흔히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 즉 생멸(), 개물(), 장소의 변화, 성상의 변전 등을 망상이라 단정하였다. 그러므로 파르메네데스가 생각한 <일자>내지 <존재>는 모든 경험적 존재가 모여서 하나가 된 것이라고 생각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자연에 관하여의 제2부에서는 비존재, 즉 현상계가 설명되고 있다. 이성으로는 오직 일자()만이 있다는 것을 굳게 믿으면서도 역시 다양하고 변화하는 현상세계를 숫제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2부의 첫머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진리의 말과 사상은 이제 끝났다. 이제부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 인간)의 억견을 말한다." 2부는 아주 불완전하게 전하여져 있어서 우리는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1부에서는 비존재. 변화를 절대적으로 부정하고 이런 것들에 대하여는 생각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2부에서는 이런 것들이 적어도 인간의 생각 속에만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비존재가 어디에도 있지 않는 것일진대 그것은 생각 속에도 있을 수 없을 터이므로, 생각 속에 있는 비존재를 설명하려는 것은 존재만을 인정하는 처음 입장과 모순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의 제자 제논(Zenon)은 이 모순을 극복하고 파르메네데스의 원리를 철저히 논증하려고 애썼다. 제논(B.C. 490~430)은 그리스의 철학자들 중 최초로 산문으로 글을 썼다. 그는 자기 고향의 도시를 참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꾀하다가 발각되어 고문을 당해 죽어가면서도 태연자약했다 한다.

그는 유일 불변의 존재를 내세우는 학설을, 이에 반대하여 세상의 사물 들의 다수성과 변화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자기모순을 지적 함으로써 변호했다. 그의 논법은 독특한 역설적 논법, 즉 일종의 귀류법으로서 흔히 <제논의 패러독스>라 불린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만일 날쌘 아킬레우스(Achilleus)와 동작이 느린 거북이가 경주를 하되 후자가 조금이라도 먼저 출발한다면 아킬레우스는 절대로 후자를 앞지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킬레우스가 거북을 앞지르려면 우선 거북이 있는 지점까지는 가야 하는데 그동안에 거북은 아무리 느려도 조금은 전진했을 것이요, 이 관계는 무한히 계속되겠기 때문이다. 무릇 운동하는 물체는 목표에 도달하려면 먼저 그 도정의 절반을 가야 하고 또 그 절반의 절반을 먼저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물체는 무수한 거리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어떤 점으로부터 다른 점으로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운동이란 것도 존재치 않는다. 운동은 시작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통과해야 할 각 거리는 다시 무한의 부분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을 앞지를 수 없음도 공간의 이러한 무한분할성(無限分割性)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2) 정지란 같은 장소에 있음을 말한다. 화살이 날고 있는 시간을 여러 순간으로 나누면, 화살은 그 모든 순간에 있어서 한 장소에만 있다. 따라서 화살은 정지해 있다. 우리가 보기에 날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러한 역설적 논증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논을 변증법(辨證法)의 창시자라 부르고 있다. 제논은 플라톤에게도 근본적 영향을 주었다.

조각상

출처: 철학개론(최명관, 관신환 지음)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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