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르다노 브루노
지금까지 우리는 르네상스 초기의 문화적 풍토와 사상가에 관해서 언급했습니다. 뒤이어 어떤 거대한 사상이 폭발해 나옵니다. 조르다노 브루노의 이론은 르네상스의 고유한 철학적 사상 가운데 맨 처음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주의 무한성을 칭송하고, 마치 이를 찬란하게 노래한 민네장 가수나 다름없습니다. 브루노는 격정적으로, 매우 흥미롭게, 비밀스럽게, 충격적으로, 그리고 모든 것을 수용하려는 자세로 무한한 우주의 내재성을 칭송했습니다. 중세 시대에 우주는 오로지 저세상 내지 내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브루노의 가르침은 앞서 언급했던 이탈리아의 자연과학 이론에 의해서 준비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이탈리아의 자연과학적 토대의 결과일 것입니다. 브루노는 이탈리아의 자연과학의 연구 결과에다가 한 가지 사항을 더 첨가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브루노의 사상과 인간적 면모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즉 그는 결국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입장에 충실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조르다노 브루노는 1548년 이탈리아의 놀라에서 태어나, 일찍이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도미니크 수도원은 아시다시피 토마스 아퀴나스의 종파에 속합니다. 도미니크 수도원은 15세기 이래로 수없이 마녀들을 심판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상대로 종교 재판을 거행해 왔습니다. 바로 거기에 브루노와 수도원 사이의 갈등이 일찍부터 자리했습니다. 결국 브루노는 수도원을 도주하였습니다. 이러한 삶 속에는 파우스트가 사용하던 사람들은 이른바 성 밖에 거주하는 하층민이라고 명명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브루노는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살기로 결심합니다. 이러한 유형의 성주들에게 마술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브루노 역시 스위스의 제네바, 독일의 뢰벤, 력의 외투가 묘하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식자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백 헬름슈테트 그리고 비텐베르크 등지에 있는 대학교에서 강의하면서 살았습니다. 부언하자면, 헬름슈테트는 19세기 초에야 비로소 대학교가 건립된 도시입니다. 브루노는 특히 비텐베르크에서 비교적 오래 정주하면서, 마르틴 루터와는 다른 여러 가지 명제들을 내세웠습니다. 브루노는 프랑스로 가서 소르본 대학교에서 물리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만약 그곳에서 규칙적으로 미사에 참가했더라면, 그는 정식으로 교수직을 얻을 뻔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종교적 의무를 모 조리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브루노는 다시 프랑스를 떠나서 영국 런던으로 갔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일시적으로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대학, 혹은 시민 계층이 그를 도와준 게 아니라, 엘리자베스의 궁전에서 그에게 단기간 도움을 주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교황으로부터 파문 조처를 당한 터였습니다. 영국의 교양 있는 귀족들은 이탈리아어를 잘 이해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탈리아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탈리아어는 유럽에서 교양 있는 언어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런던의 세계 시민, 브루노는 여러 가지 글을 썼는데, 그 가운데 성회 수요일의 식사도 있었습니다. 이 글은 당시 영국의 현실을 묘하게 풍자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기꾼이 브루노가 이탈리아로 돌아오도록 유혹했습니다. 그는 브루노의 충직한 친구가 되고 싶은데 만일 지혜를 전수해 주면 그를 정성스럽게 모시겠다고 편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브루노는 사기꾼이 거주하는 베네치아로 갔는데, 그곳에 도착하는 즉시 종교 재판의 희생자가 됩니다. 베네치아의 종교 재판소는 마치 포획물을 노려보는 맹금처럼 브루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선 나는 브루노가 남긴 책에 관해서 몇 가지 사항을 언급하려고 합니다. 중세는 마치 갑옷처럼 경직된 형식 속에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철학적 내용은 바로 그러한 경직된 틀 속에 갇힌 채 약간 꿈틀거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은 새로이 대두된 철학에서는 대부분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가톨릭을 신봉하는 대학교들이 프로테스탄트의 대학교에 비해서 더 훌륭하고, 더 재미있는 학문적 내용을 다룬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모조리 제거되었습니다. 과거의 것들은 새로운 현실과 직면하여, 이를테면 예수회가 내세운 학문적 방식에 의해 적절하게 순응하는 절차를 거쳤습니다. 이 와중에도 어떤 첨예한 사상들이 제기되었습니다. 17세기 초 포르투갈의 코임브라에서 활동했던 프란시스코 수아레스와 같은 중요한 사상가들에게서 지금까지 인정받지 못한 핵심 쟁점들이 이따금 출현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러한 쟁점들은 수아레스가 후세에 남긴 형이상학의 토론들이라는 문헌에 잘 나타납니다. 전반국으로 당시의 철학은 불필요한 사변적 내용만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가평 교리 지침서와 같은 평범한 특성을 지니며, 어디서나 똑같이 발설되는 내용 • 정리한 사항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은 새로운 스콜라 학문을 배우면서 틀에 박힌 모범생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거기에는 삶의 고통도 진지한 노력도 없었으며, 최소한 과거의 스콜라 학자들로 하여금 어떤 결실을 맺고자 했던 일말의 대담성조차 자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자유로운 사상을 드러낼 수 있는 어떤 형식이 출현했습니다. 그것은 <대화> 내지는 <에세이>의 형식으로서 자유로운 작가적 성향의 내용을 담기에 적합한 것들이었습니다.
출처: 서양 중세 르네상스 철학 강의(에른스트 블로흐 지음, 박설호 옮김)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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